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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

제목:   우리나라 전기통신 100년사 (1)

작성자: KARA
Updated on 09/25/2010
우리나라의 전기통신 100년사
자료출처:중앙전파관리소 (전파관리50년사)

전신의 발명

역사가였던 모스(S.F.B Morse)는 미국 정부로부터 건설자금 3만 달러를 받아 워싱통과 64km 떨어진 항만도시인 볼티모어 사이에 1845년 5월 24일 전신선로 가설을 완공하고 1845년 정월 초하루 전신사업 개시의 법률을 성립시킨 미의회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식장인 의사당에서 정계.재계의 인사 등 여러 내빈이 지켜보는 가운데 발명자 모스 자신이 전신개업 최초의 전건을 두드렸다. 이 때 전송된 개통식 메시지는 성서중의 한 구절인 "What hath God wrougnt!" 였다.

그 후 한 세게 사이에 전신,전화,라디오,TV등 전기통신은 눈부신 발전을 계속하게 되었고,전화에 의한 전기통신은 오늘날 인간 생활 전반에 걸쳐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까지 인식되기에 이르렀다.


모스 이전에도 유선전신의 발명이나 연구가 몇 사람의 선각자들에 의해 행해진 바 있었다. 1787년에 스페인 사람 베단쿠르는 물체가 마찰할 때 생기는 정전기를 통해 보내는 실험을 행한 바 있었고,영국, 독일,러시아 등 유럽 여러나라의 학자들에 의해서도 전신의 실용화에 관해 열심히 연구되고 있었다.

1834년 영국 사람 쿠크는 5침식 지시전신기의 실용화 실험을 행했는데 이는 5개의 자침을 나란히 배치하여 전기의 강약에 따라 움직이는 침의 조합에 의해 문자를 보내는 방식이었다.

전기에 흥미가 많았던 모스는 유럽여행중 대서양 선박 내에서 알게된 학자로부터 전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후 연구에 몰두한 끝에 1839년 9월 뉴욕대학에서 500M의 전신선을 깔아 전자석식 전신기의 실험에 성공하기에 이르렀다. 실험에 성공한 모스는 이의 특허권을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에 팔고자 했으나 냉담한 반응이었다. 그 당시 프랑스에서는 세마포르(Semaphore)통신이 행해지고 있었고, 영국에서는 1841년에 런던과 스로우 사이에 다른 방식에 의한 전신 개통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판매에 실패한 모스는 미국정부와 열심히 접촉하여 정부 직영의 전신업무를 개시하는데 성공하였다.

당시의 전신기들은 시계의 문자판에 숫자 대신 A, B, C, 등 알파벳 문자를 가르키게 하는 방식이 대부분이었고 모스 전신기는 모스부호에 의해 인간의 말을 점( . )과 선( - )2종류의 부호만의 조합으로 바꾸어 전건을 두드리는 통신방식이었다. 따라서 일단 모스부호로 통신하는 모스방식은 당시로서는 매우 귀찮은 일로 여겨져 부호를 외울필요없이 누구나 통신이 가능한 시계의 문자판 방식쪽이 더 인기가 있었다. 발명 당시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던 모스식 전신기는 전신이 철도의 안전운행 수단으로 발달하면서 다른 전신기를 물리치고 전신의 왕자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근거리의 정보전달에 있어서는 다른 전신방식 쪽이 쉬었지만 점차 전신이 상업화되어 먼곳에 많은 양의 통신문을 전송하게 됨에 따라 전류를 점( .)과 선( - )으로 두드리기만 하면 전송시킬수 있는 모스 방식이 고장도 적고 전신선의 장거리 건설이 쉬워 단연 유리했기 때문이다.

모스전신이 미국정부에 의해 건설되었듯이 다른 나라에서도 우선해서 국가가 전신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국가가 통치기구로써 지배를 확립,유지하는데 있어 전신이 갖는 속보성, 즉. 나라 구석구석에서 일어난 일을 신속히 파악하고 즉시 이에 대응할수 있는 명령을 전달하는에 있어서는 최대로 유효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모스 전신 개시 14년 전인 1830년 영국의 스티븐슨이 자신이 발명한 증기기관차를 손수 잉글랜드 북서부의 상업도시인 리퍼블 사이의 45km를 운전하여 세계 철도의 신기원을 이룩했고, 그 후 철도는 산업혁명의 기수로서 유럽쪽으로 급속히 발달되어 나갔다.

전신은 철도의 보급과 더불어 철도 연선으로 확대되어 갔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각지를 연결하는 전신망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는데 1852년 영국은 전장6,500km 의 전신망을 가지게 되었다.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1845년에, 다음에6월에는 오스트리아,벨기에,헝가리가 속속 전신선로를 완성하였고,1852년에는 스위스,러시아에서도 전신망이 완성되었는데 대부분이 철도용이었지만 드디어는 유럽 전체를 하나로 있는 전신망으로 발달하기에 이르렀다.

철도 운행 수단으로서의 전신망은 1851년 영국사람 그레트에 의해 영불해협인 칼레와 도버 사이의 약 50km에 해저전신이 부설됨으로써 새로운 정보통신수단으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영국과 유럽은 정보면에서 한 몸이 되게 되어 새로운 정보산업의 발달을 촉구하게 되었다.

당시의 통신수단은 전서 비둘기가 중심이었다. 도버해협에 해저전신 케이블이 부설된 것이 알려지자 파리의 통신사에 근무하던 로이터는 직장을 그만두고 1852년에 런던으로 이사하여 영국과 유럽을잇는 통신사를 경영하게 되었다. 전신을 중심으로 하는 로이터의 통신사는 전서 비둘기를 중심으로 하는 다른 통신사에 비해 속보성이 커져 갔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세계적인 통신사인 로이터통신의 기원이 된 것이다. 미국에서도 AP통신이 전산망을 구사하여 뉴스서비스를 개시하는 등 전신은 철도로부터 상업적인 이용에 제공되었다. 전신이나 전서 비둘기를 이용하기 전에는 시각에 의한 통신방식이 주 였다.

트로이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군대는 이러한 승전보를 산에서 산으로 횃불에 의한 릴레이 방식으로 본국에 속히 알렸다고 한다. 이와같은 원시적인 시각통신방식은 꽤 오랫동안 사용되었고, 18세기에서부터 19세기에 걸쳐 유럽에서는 세마포르(Semaphore)통신이 보급되기에 이르렀다. 세마포르통신방식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것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이 일반적인 것은 기둥이 상하로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는 가름대(가름목)를 붙인 것을 탑위에 설치한 것인데,이런 것은 수십 킬로미터에 하나씩 설치해 놓고 미리 가름대 형상에 따른 통신부호를 정해두고 망원경으로 살펴 사람의 힘으로 가름대의 형상의 변화를 중계하여 전달하는 통신방식이었다. 1790년 프랑스의 기사 사페(C.Chappe)가 세마포르라는 시각 신호를 이용한 일종의 통신기의 실용화에 성공하자 프랑스 정부는 곧바로 이 통신방식을 채용하기에 이르렀고,1890년경에는 총 연장4,800km 에 556개의 세마포르 신호국을 가지게 되었다. 그 당시 영국, 네델란드,러시아,오스트리아 등의 연합군에 밀리고 있던 프랑스 군대가 이 세마포르에 통신으로 종종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전국적인 통신 조직이 전쟁과 관련을 가지게 된 최초의 사례라 하겠다. 세마포르 통신은 안개가 낀 날이나 시계가 좋지 않아 긴급한 통신일지라도 주간에 할 수 밖에 없었기에 비능룰적인 통신수단이었다. 수 백개나 되는 중계 신호소를 산이나 들에 건설해야 했고,신호의 조작을 위해서는 많은 인력을 배치해야 했으므로 경제적 부담도 컸다. 그러나 18세기에서부터 19세기에 걸친 시대로서는 비능률적이고 막대한 돈이 든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세마포르 통신이상 빠른 통신수단이 없었으므로 그 당시의 정부로서도 세마포르 통신을 유지한다는 것이 군대의 유지나 마찬가지로 국가의 통치상 필요 불가결했을 것이다.

고대의 연기나 횃불에 의한 통신이나 18세기의 세마포르통신 모두 그 통신의 범위는 육상에 한정되었지만 모스의 전신 발명과 영국의 그레트에 의한 해저케이블의 포설 성공은 육상에 한정되었던 통신을 바다를 넘나드는 전기통신의 시대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도버해협에 해저전신이 포설되고 나서 6년 후인 1857년 미국 순양함 나이애가라와 영국선박 아가멤론이 뉴펀드랜그와 아일랜드사이에 해저케이블 포설에 나서 몇 차례의 케이블 절단사고를 만나면서 1년여에 걸쳐 케이블 포설에 성공했으나 송신장치에 이상이 생겨 8년이란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대서양 횡단 해저전신에 성공을 보았다. 즉, 1865년에 드디어 인류의 통신능력이 유럽과 미국 대륙을 직접 연결하기에 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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