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AA6QF(HL1ABZ)
Updated on 09/24/2010
취미중의 왕 중 왕 아마추어 무선 의 회고 AA6QF
내가 아마추어 무선을 접하게 된 것은, 1959년대 말 주말인 토요일
청계천 세운상가 2층에 있는 과학 문고 서점에서였다.
당시 나는 서울 공고 재학생으로 전기 서적을 구하러 갔었다.
전기 서적 코너를 돌아 보던 중 눈에 확 띄는 조그마한 책 한 권을 잡고 선 채로 탐독을 시작했다.
취미중의 왕 중 왕 아마추어 무선 이란 책이었다.
읽을수록 재미있고 흥미 진진했다.
그 책을 사 들고 집에 오며 전차 안에서 벌써 다 읽었다.
두말 할 것도 없이 다음 주말 한국 아마추어 무선 협회를 찾아 가서 조건을 알아 보고
준회원 HM-14??으로 접수를 하고 회지 한 부를 손에 들고 집으로 돌아 오며 매우 들떠 있었다.
우선 모르스 코드를 외우는 일이 문제였다.
지금같이 협회 에서 교육이나 학원도 없어서 배울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 자취생활 주인집 주인이 통신병 출신이라 물어 보고 알았다.
그것도 힘든 것이 한글과 영어 송수신을 다 하여야 하니까 힘든 일이었다.
나는 컨닝 페퍼 같이 손에 들어가기 좋은 크기로,
모르스 코드를 한글, 영어, 숫자, 그리고 특별 기호를 적어 가지고
통학하는 전차 안에서 도쯔돈돈(당시 일본식 발음) 하며 중얼 거리면,
옆에 있는 사람들이 웬 정신 나간 녀석 중얼 거리는 줄 알고 이상한 눈으로 처다 보곤 하였다.
몇 개월이 지나서 이제는 전차 안에서 지나 가는 간판을 보고
읽기 시작은 했는데, 수신하는 공부가 문제였다.
당시에는 시험이 일년에 한번 체신부에서 보는데
그것도 신청자가 적으면 해를 걸러서 시험 기회가 없었다.
불행 하게도 나는 첫 해는 모르스 코드와 통신 공학을 공부 못해서 못 보았고
다음 해부터 인원이 적어 3년을 걸러서 겨우 협회에서 요청하여
시험관 수당 경비를 부담하는 조건으로 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시험에 떨어지고 거의 포기 상태였을 때,
그 때에 취미로 하던 8mm 무비 카메라 동호회 회원 DP점에
핸 헬드를 갖고 들어 오는 것을 보고 붙잡고,
시험 보고 떨어진 이야기를 했더니
자기가 도와 주겠노라고 하며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통신 공학 책과 모르스 코드 연습용 테프를 빌려 주어 카피하고 또 재 도전을 하였다.
수시로 그 집을 찾아 사부로 생각고 열심히 배우고
삼자 통화도 하면서 더욱 흥미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집뿐만 아니라 개국한 사람과 만나게 되면 염치 불구하고
찾아가서 물어 보고 또 늦게까지 무전기 에서 교신하는 것을 듣고
삼자 통화 해 보고 열심을 내었다.
그리고 안테나 설치하면 감초같이 참석하여 보고 배우다 보니
이론 상으로는 환하게 되었고 콜 싸인 없는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협회에서 교육도 없었고,
마음대로 리그도 살 수 없어 개인이 단파 수신기를 개조 하거나
군대 통신 장비 페기품을 사서 고치는데 확률은
20%도 안 될 정도라 햄 생활 하기도 힘든 상황 이었다.
더구나 시험에 합격해도 리그를 구입하여 안테나 설치하고
체신부로 부터 준공 검사를 받고 합격해서 개국 승인을 받아야
콜 싸인 이 나오는 시절 이었다.
그래서 나도 시험에 합격 하고도 몇 년을 전국에 돌아 다니며
리그를 찾느라고 애를 먹었다.
간혹 리그가 있다고 해서 찾아가면 자기가 쓰다가
고장이 나서 못 쓰는 것이 대부분 이었다.
한번은 산림청에서 쓰다 페기 처분 한 것을 사서 고치려다 포기하고
돈만 버렸고 포기 상태로 또 몇 년이 지났다.
그때 내가 체신부 광화문 전화국에 근무 할 때
전파 관리국에 근무하는 부부가 있었는데
부부가 햄이었는데 처갓집 삼촌이 월북 했다는 사실이
신원 조회에서 발견이 되어 면허가 취소되고
교신을 못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현찰을 들고 집으로 찾아가서
그 동안의 애로 사항을 이야기하고 사정하여 빼앗다시피 하여
KENWOOD-530D 리그를 들고 오면서 눈물을 흘린 것도 추억에 아련하다.
당시에 일제 완제품으로 그런 리그를 구하기가 퍽 힘든 때였다.
그래서 전국적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고 많은 후원자들이 모여 안테나를 설치하고,
개국을 신청하여 한 5-6개월 만에 설치 승인을 받고
HL 1 ABZ 콜 싸인을 받고 개국 할 때 30여 명의 축하객들이 모여
동래가 떠들썩 하게 잔치가 벌어 졌다.
햄 생활을 하면서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당시에 정부로부터 햄에 대한 관심도가 적고 회원도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 콜 싸인을 관장하는 사무실에서 , 이북으로부터 이의 신청이 들어와
콜 싸인 배정을 다시 한다는 연락을 받고도 거기에 준하는 대처를 못하고,
이북에서는 햄이 한 명도 없으면서 3,000명의 회원이 있다고 회비를 납부하는 바람에
HM-???? 콜 싸인을 이북에 빼앗기고 우리 남한은 HL-???? 콜 싸인으로 햄 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방송국, 일반 통신도 바뀌게 되는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내가 받을 때부터 새 콜 싸인을 받게 되었다.
그 후로 햄 사무실이 남산에서 원남동으로 다시 여의도로 옮기면서
어렵게 자급 자족하게 되고,
협회의 감사로 총회에서 선임이 되어 일하기 시작하여
협회에 건의하여 먼저 시험을 매년 정기적으로 할 것을 건의 했고,
결국에는 감독은 체신부에서 하되 주관은 협회에서 하며 감독관의 수당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인수하여 드디어는 일년에 2회씩 개선이 되었고 협회에서 교육도 시작이 되었다.
어렵게 시행이 되었지만 협회 이사장을 당시 여당 청년국장으로 초대하여
상공부와 협력하고, 협회 임원들이 일본 협회 창립 기념일에 참석 해서
일본 KENWOOD와 YAESE 회사를 방문하고 협의하여 한국의 햄으로부터
리그의 1/3 값을 지불하고 신청하여 한국 공항에 도착하면 완불하는 조건으로 하여
많은 햄들이 완제품의 리그를 공동 구입하느여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되었고
많은 햄이 폭발적으로 급증하는 현상이 생기는 쾌거 였다.
그 후 한국에서 일본 모 회사의 제품을 생산 했으나 인기를 못 얻고
한국 독자의 생산품이 나오기 시작하여 많은 회원이 확보 되었다 .
햄 생활을 하면서 가장 잊을 수 없던 몇 가지 추억을 더듬어 본다.
개국을 하고 밤이면 밤마다 삐익- 삐익- 소리를 내면서 DX에 열을 올릴 때 였다.
안테나가 자작한 것이라 성능이 안 좋아 귀를 기울여야 겨우 듣는 형편인데
미국 동부 건너편 조그마한 섬 나라(국명을 잊었음) 에서 겨우 겨우 어렵게 응답이 와서
기본적인 안부만 묻고 끝났을 때의 기분은 말로 표현 할 수 없었고 후에
QSL 카드를 받고 기쁨의 환성이 터졌다.
아주 교신이 힘든 희귀국 이었다.
한번은 모 대학교 전기 공학과 교수가 TV에 나와서 모든 안테나는
번개를 끌어들여 위험 하다고 방송이 되자 ,
구 반포 아파트 어머니 회에서 우리 집 안테나를 철거 하라고 데모 하는 바람에
협회에서 공문도 발송하고 했지만 결국에 내가 이사를 하여 방배동으로 갔다.
흰 눈이 소복히 쌓이는 어느날 밤 난데 없이 칼빈 총을 든 순경 세명이
발로 문을 걷어 차고 들어오며 손을 들라고 한다.
당시에 이런 일은 종종 있는 일이라 그들을 설득하고,
체신부 장관이 발행한 면허증과 방송국 개국증을 보여 주자
일단은 파출소로 가서 조서를 작성 하자면서 나를 연행했다.
옆집에서 간첩 신고가 들어와서 밤 12시부터
새벽 3시 까지 눈 맞으며 살피다 들어 왔다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막걸리 한 말과 찌개 안주를 시켜 주고야
새벽 5시 파출소에서 해방 되었던 일을 잊을 수 없다.
또 협회 차원에서 있었던 일은
어느 해인가 우리 한국 등반대가 마나슬루 등반 중에 등반자 전원
12명이 사망 했다는 소식을 인천에 있는 햄이 듣고 ,
명단을 부탁하자 그 쪽의 신부인 햄이 4시간 달려가서
12명의 명단을 전해와 인천의 햄이 자기 친구인 조선일보 기자에게
그 밤에 연락하여 유일하게 특보로 조선 일보에만 게재 된 정보를
입수하여 각 신문사가 기자를 차출하여 햄 교육을 받고 햄 크럽국을 설치한 사건,
어느 해 여름 매년 격는 수해로 인해 등반 사고가 났는데
마침 그 중에 햄이 한명 있어서 그의 연락을 받고 협회를 통해
전국에 연락하여 군 헬리콥터를 겨우 동원하여 구출한 것을 계기로
적십자사 이호 총재가 시무 할 때, 전국의 수해 조사가 한달 이상 걸리자
방법을 찾던 중에 한 햄 회원이 건의하자,
다음해에 적십자사, 신문사, 햄의 경쟁이 되어 수해 집계를 냈는데
햄이 2시간, 신문사가 3일, 적십자사가 2주 걸리자 특명을 내려
각 지사는 젊고 똑똑 인재 2명씩을 의무적으로 차출하여
햄 교육을 받고 면허를 취득하고 ,
예비비에서 리그를 사서 방송국을 설치하라는 명령에
적십자사에 햄 크럽국이 설치된 것,
또 어느 해 임산부가 독사를 물려 서울 대학 병원에 후송 되었는데
해독 약이 없어 협회를 통해 전국에 연락을 했는데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에 햄이었던 한 대위와 연결이 되어 자기부대 병원에
약이 있다는 통보가 와서 후송 작전으로 재 방송을 하자
미국에서 출발 한 KAL 승무원인 햄으로부터 2시간 후에
하네다 공항에 도착 예정이라는 소식에 다시 일본에 연락하자
그 대위가 부대장의 승인을 받고 헬리콥터로 하네다 공항 까지 후송하고
그 사이 환지는 병원에서 엠부란스로 김포 공항 의무실에 대기,
도착하자 마자 주사를 맞고 회복한 사건
( 그 해독 약은 한번 대기권에 나오면 24시간을 경과하지 못한다고 함)
LA 에서 있었던 일로는 멕시코에서 지진이 발생 했을 때
유일하게 우리 아리랑 햄 멤버들이 듣고 한국일보와 LA TIMES에
뉴스를 제공했고 한국의 부탁으로 영사관을 통해 우리 교민들의
피해 상황을 전한 사건,
강동석 태평양 요트 항해시 교육부터
면허 획득과 항해 시 교신으로 위급 상황 일 때 지상 통제소와 연락,
졸릴 때의 교신 등 과연 강동석이 우리 아리랑 햄이 아니었으면 성공 할 수 있었을까?
한번은 강동석이 신호가 끊기고 소식이 없어 전 회원들이 총 동원 한적이 있었는데
당시 나는 안테나가 자작한 쿼드 안테나 였다.
성능이 안 좋아 교신이 안 되는 줄 알고 긴급히 야기 안테나로 바꾸고,
2KW 리니어 앰프를 사용하여 몇 일을 불러 대는 일이 있었다.
한 일주일 후에 옆집 사람이 나를 만나자 반갑게 인사하며 어렵게 질문을 한다.
자기 친한 친구가 VAN NUYS HAM CLUB 골수분자 인데 여행을 가서 못 만나서 그러는데,
사실은 자기 집에 전화와 초인종에 인터페어런스가 들어 오는데
어떻게 조치하면 되는가 알려주면 시정 하겠노라고 말을 해서,
내가 자초지종을 이야기 하고 내가 먼저 조치하고 또 위급시가 아니면
리니어 앰프를 안 쓰겠노라고 말하여 웃고 끝낸 일.
윌셔 경찰서에서 교육을 받고 공동으로 한인 타운을 왓치 할때
한 강도가 권총들고 리커 스토어에 들어 왔다가 도망 간 사건.
속도 위반으로 경찰에 걸렸다가 윌셔 경찰서 발렌티어 신분증 덕분에
세번이나 면제 받은 일, 명함에 콜 싸인을 인쇄 했는데 전기 공사 인스펙터가
햄이라 덕을 본 사건 등 개인적으로도 많은 도움이 있었지요.
그리고 한국의 날 행사에서 끝나고 미아 찾아주기,
한국 노인회 주관 마약 방지 캠페인 행사시 협조,
한인회와 공동으로 한인 타운 사고 방지 및 예방 운동 협조,
그 후 단독으로 우리 회원들이 한인타운 왓치 팀 구성 현재까지 운영등 많은 일들이 있지요
끝으로 많은 사건들이 있었지만,
83년도 이민와서 첫날 한국에서 알던 햄들의 전화 번호를 내 놓으며
연락해서 만나게 하라고 동생에게 말 했더니,
웃으며 형 여기는 한국이 아니예요 이 사람들을 만나려면 차로
2-3 시간이 아니라 비행기로 3-4시간을 가야 합니다 하는 것이다.
그때 참 많은 실망을 했었다.
그런데 밖에 나갔던 동생이 오후에 급하게 들어 오며 하는 말이,
주간 신문사 친구를 만나러 갔더니 거기에 형이 원하는 것이 있더라며 내어 놓는다.
한 회장님이 햄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보자고 신문에 낸 것을 보고,
즉시 아파트로 찾아가서 만나 뵙고 의기 투합하여 JUN,S SHOP 을 통해
리그를 구입해 간 한국 사람들의 주소를 확인하여 조직한 것이
우리 아리랑 크럽 이었다가 협회로 성장 했다.
한 회장님과 우리들은 정보를 입수하여 면허 시험을 보았고
또 업그레드하여 회원들을 양성 했고,
우리 협회에서 제일 처음으로 내가 미국 무선 연맹의 시험관 자격을 취득하여
업그레드와 새 회원 교육을 열심히 한 것은 내 생애 잊을 수 없는 일이다.
당시에 우리는 FCC에 가서 시험을 보았고,우리들이 업그레드 하자
자체적으로 각 모임에서 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뀐 것이
우리 동호회가 발전한 큰 계기가 되었다.
한참 교육을 하고 시험 치르고 할 때, 적당히 면허를 안 준다고 공갈 협박도 받고,
또FCC에 감사를 치르노라고 홍역도 치룬 것은 슮은 일이다.
그 후에 나는 2001년부터 구 소련 우크라이나로 선교 갈 때에도,
그 곳에서 햄을 통해 회원들과 교신하고 싶어서 콘테이너 이불 속에
리그를 넣어 통관 시키는데 그 곳에서 별 쑈를 다 하여 통관 했지만
결국 개국을 못 하고 말았다.
5년 후에 급성 신부전증이 발생하여 2005년부터 투석을 하며 투병 중에 있지만
그래도 햄을 못 잊어 얼마 전 옛날에 쓰던 핸 헬드를 찾아 보았지만
전지 불량으로 못 쓰게 된 것을 JUN,S SHOP을 통해 대치품을 구하여
이제는 체크인 시간부터 나가기 시작 했다.
앞으로 많은 교신을 바람니다.
한참 교육을 할 때 여러 명으로부터 들은 이야기 인데,
햄은 마약보다 더 독합니다. 안 하려고 했다가도
리그만 보면 안 나갈 수 없어 또 잡게 됩니다,
그러니까 교육 할 때 먼저 리그를 사도록 하면 안 할 수 없습니다.
하는 말을 많이 들었다.
그렇다 나 역시도 투병 생활 하면서 간절한 마음이 든다,
함께 나가서 어울리지 못하는 것이 퍽 안타까운 일이다.
속히 회복되어 여러분과 아이볼 하는 날을 기다려 봅니다.
나는 죽어서도 내 무덤에 콜싸인을 넣어 달라고 할 판이다.
회장님의 권유를 받고 내가 그 동안 애지중지 하던 취미 생활을 뒤 돌아 보며
추려서 적어 보았는데 처음 하시는 분이나 그 외 오엠 들에게도
많은 동감이 갔으면 하는 마음 으로 난필을 맺어 봅니다.
2007년 병상에서 AA 6 QF
위 글은 8월 9월소식지에 연재된 글이다.
AA6QF 님 허락없이 이곳에 올린다.
건강하시길 바란다.
N6OH -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