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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RA

제목:   한국 아마추어무선의 역사

작성자: KAILRO
Updated on 09/21/2010
한국 아마추어무선의 역사

◎ 일제시대(1937~1945)

한국아마추어무선의 역사는 일제시대까지 포함할 경주 1937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그때는 우리 나라 고의 PREFIX(LH 등)가 아닌 일본의 것(J8AA~J8OZ)을 사용하였으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은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그 틈엣 불과 몇 명의 조선인이 아마추어무선국을 가지고 있었으나 이것도 제2차 세계대전과 함께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 수난기(해방이후 ~ 6.25전쟁)

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고, 어디를 가나 아마추어무선을 즐기는 그들은 이 땅에서도 예외 없이 햄의 전파를 발사하였다. 그래서 해방 덕분에 우리나라에 할당된 HL이라는 PREFIX가 우리들이 한번 써 보기도 전에 외국인의 손으로 먼저 전 세계에 퍼졌다. 누가 허가를 해줬는지 또 는 무허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HL의 호출부호로 무허가 전파를 냈다가 헌병의 포위를 받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의 정부가 수립되고 "이제는 우리에게도 무선국을 허가해 주겠지"하고 기다릴 여가도 없이 6.26전쟁이 일어났다. 아마추어무선은 결국 한 두 명의 입에만 오르내린 채 어둠 속으로 사라져야 했다.

민족의 불행한 수난사와 함께 묻혀 있던 아마추어무선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은 휴전이 성립되고 얼마 후부터였다.

◎ 태동기(1952 ~ 1954)

이 땅의 아마추어무선의 선구자들은 개인적으로 정부와 교섭을 시작하여 아마추어무선국의 허가를 용구하였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무선=간첩]이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던 그 시기의 한국에서 이것이 쉽사리 성공할 리가 없었다.

무선국 허가의 가능성이 없어 보이자 이들 선구자들은 무허가로 전파를 내기 시작하였으며, 그 수는 점점 늘어갔다. 자칫하면 간첩으로 오해받을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아마추어무선이 간첩에 이용된 것은 아마추어무선사 70여 년에 한번도 없었음을 알고 있는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전 세계로 전파를 보냈다. "한국에서는 언제 햄이 나오려나?"라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 세계의 햄들은 이들을 열렬히 환영하였으며 그들은 곧 유명해졌다.

그러나 숨어서 하는 일이 오래 갈 수는 없어, 그 중 여러 명이 경찰, 헌병대 또는 전파감시국에 적발되어 처벌을 받기도 하였다.

1954년 여름, 무허가로 몰래 전파를 내던 햄들과 전파도 못내고 안타까워하던 햄들은 드디어 단체의 힘이 필요함을 느끼고 햄들의 연합체를 만들자고 나섰다. 그리하여 햄들이 제일 많았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약 반년의 기간을 거쳐 1955년 4월 20일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의 창립 총회를 열고 동국무선 고등하교의 교실을 하나 비려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의 결성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 나라 무선계 최초의 단체로서 전파협회보다도 3 ~ 4년, 전파공학회보다도 7 ~ 8 년이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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